촌락문서에는 토지가 결․부․속 단위로 자세히 파악되어 있다
국가에 의한 양전은 곧 토지에 대한 조세부과를 전제로 한 것이라고 볼 때, 결부법에 의한 토지의 파악은 토지가 주요 세원이 되었음을 뜻한다고 상정해볼 수 도 있겠다.
그러나 토지는 노동력과 결합되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안정적 생산을 낼 때, 수취의 주된 대상이 될 수 있다. 당시 토지에 비해 인구가 적 고, 호구의 이동이 잦으며, 토지 생산성이 낮고 농법이 휴한 법 단계에 있었던 상황을 고려할 때, 결부 법에 의한 토지 면적 표시가 곧 결부 단위로 전조 가 수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시기 당에서도 頃․畝 단위로 토지를 파악하였지만 조세는 호등에 의해 부과되었고, 그 호등은 소유한 토 지 면적에 의해 산정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신라 통일기 때 토지가 조세 부과의 기준이 되었다면, 고려 시대의 田券에서 보이듯 陳田 여부에 관한 언 급이 따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당시는 아직 토지의 연작 상경이 일반 화 되지 못한 단계였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는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이다. 그리고 이 시기 사용된 결부 법은 수확량 기준이 아니고 절대면적 기준이었던 만큼 토지의 비척도에 대한 고려는 안정적 조세 수취를 위한 필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언급이 촌락문서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고려 시대에 접어들어 호적과 양안이 분리되었고,
연령 등급제가 폐지되었으며, 절대면적단위인 결부법으로 표시된 토지에 대한 조세부과를 좀 더 합리적으로 하기 위해 田品이 설정되었던 점 등이 유의된다. 특히 신라 말에 세워진 개선사 석등기에서 소유주의 畓의 소재처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사방의 지 점을 기술하고, 奧畓과 渚畓으로 답의 종류를 구분하여 기술하여, 촌락문서 와는 다른 기재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는 위에서 지적한 요소와 연관해 볼 때 새로운 변화로써 주목된다. 한편 인정기준설의 문제점도 지적되었다. 즉 만약 인정이 기준이었다면 왜 이들 촌에는 등급이 높은 호는 없고 仲下烟이 최고의 등급호가 되었으며, 4개의 촌락의 등급호의 분포 비율이 각 촌락의 호당 인구수나 丁의 수와 비례하지 않은가 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당시 조세 부과의 주된 지표인 계연을 산출하는 근거인 호등을 설정하는 기준은 인정을 중심으로 한 총체적인 자산이었다고 보는 설이 보다 설득력을 지닌다. 촌락문서는 수취를 위해 작성한 행정문서이다. 국가는 조세를 안정적으로 징수키 위해 세원에 대한 자세한 파악을 하 려 했을 것이고, 그런 면을 행정문서에 반영하였을 것이다. 촌락문서에서 인 정에 대한 기술이 자세하고 양적으로도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적어도 인정이 조세 수취에 중심이 됨을 뜻한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 다. 반면 토지에 대한 기술에선 陳田 여부와 전답의 종류나 등급에 대한 기 술이 전혀 없다는 점은 적어도 토지가 주된 조세부과의 항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당시 토지가 전혀 조세의 대상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촌락문서에 烟受有畓에 속하는 촌주위답이 있다. 이는 촌주의 직무 수행에 대한 보수로 지정된 것으로서, 아마도 촌주 소유지를 位畓으로 설정하여 면세를 해준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곧 토지에 어떤 형태의, 아마도 부가세적인 성격의, 조세가 부과되었음을 말해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3) 이렇게 볼 때, 통일신라의 수취 제도가 삼국 시기의 그것과 현격하게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통일기 신라 때 조세 부과의 주된 기 준이 토지에 있지는 않았다는 점은 이 시기 관리에 대한 보수 지급방법 체계에 대한 이해에도 적용된다.